「그래그래. 결국 그걸 보고 싶었던거야 Miss 크로스.
여자는 남자보다 이지적이고 합리주의에 리얼리스트.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네 여자라는 것들의 거창한 주장은 결국 감정론에 지나지 않아. 리리스며. 아스트며. 그리고 물론 너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힘이 되고 싶어. 사랑합니다.
그러니 절 봐주세요. 부디 곁에 있게 해주세요. 당신의 힘이 되고 싶어요. 전 뭐든지 할테니까……
별로 그게 나쁘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하나만 말해보면……
네놈들 바보냐?
뭐야 그게? 난 전혀 이해가 안돼. 자기 인생, 남을 따라다니면 뭐가 즐거워? 스스로 자신을 유지할 수 없으면 처음부터 태어나지를 마. 태어났으면 죽어버려.
뭐 이래저래 이유는 있지만 알기 쉽게 말해주지.
요컨데 너 굉장히 눈에 거슬려.
……뭐야, 나도 꽤 감정적인 이유잖아」
1. 신좌만상 시리즈의 시작과 마사다의 데뷔 시절
마사다 타카시의 신좌만상 시리즈 제1편. 시리즈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플레이 했습니다.
파라로스는 신좌만상 첫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사다의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페이트 등등 에로게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화제작들과 함께 발매된 탓에 완전히 묻혀버렸습니다. 사실 이게 묻힌 이유는 페이트고 나발이고 그냥 그림이 구린 탓이라 생각하지만요. 여튼 이런 배경은 그렇다치고 마사다의 풋풋한 동정내가 느껴지는 게임입니다.
원래 좋은 평가를 받는 텍스트를 쓰는 양반은 아니지만 이 시절엔 정말 흑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 바람소리 묘사(휴우우우우우웅 같은)같은 걸 쓰고 있고 스토리 전개도 매우 난잡합니다. 문장력도 스토리텔링도 초짜 느낌이 확 납니다. 게다가 흔히 말하는 설명이 매우 부족한 게임이므로 한번 클리어한 걸로는 결국 뭔 얘기였는지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만약 다른 신좌 겜들을 한 상태에서 신좌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타나일이 대체 뭐라 쭝얼거리는 건지 맥락을 잡을 수 있겠지만, 파라로스만 한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뭔 개소리인가 싶을 겁니다.
중2배틀, 전생, 신, 극무대 등등 마사다의 작풍 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들입니다. 특히 단 한명의 신격 캐릭터가 등장인물들에게 역할을 주고 무대를 준비한다는 플롯은 디에스이레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이 파라로스가 마사다의 게임 중에서도 디에스와 가장 비슷한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중에서 사타나일이 계속 무대와 역할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면 디에스에서 메르크리우스가 주인공들과 흑원탁을 징하게 괴롭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아마 파라로스를 쓰면서 디에스 윤곽도 비슷하게 구상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럼 과연 마사다가 파라로스를 쓰면서 이미 신좌만상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었는지가 또 궁금해질 겁니다. 본인 말로는 이때 이미 신좌 시리즈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니 사실이겠죠. 신교대극에 대해 사타나일의 입에서 어느정도 설명이 되고 있는 걸로 보아 구체적이진 않아도 얼추 윤곽은 잡아놓은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중간에 한두번 언급된 브리아, 아틸토같은 말은 별 생각없이 끄적인거겠지만.
유교, 도교, 불교, 신도, 인도신화 등등 여러 종교와 신화를 접목해서 중2배틀과 스토리 설정을 짜내는 마사다. 뭐 대부분의 중2배틀 장르가 그렇죠. 파라로스는 그중에서도 거의 카발라와 성경이 중심. 덕분에 다른 중2 컨텐츠랑 딱히 차별화 할 수 있을 만한 모양새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교대극이라는 마사다의 장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겜들을 압도할만한 매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다의 미친 캐릭터 만들기도 이 시절엔 역시 좀 미숙함이 느껴지죠. 뒤에 자세히 언급하곘지만 쥬다스 말고는 확 느낌이 오는 캐릭터가 없습니다.
2. 낮은 배틀 비중
전투씬 역시 마사다 작품 중 가장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애당초 마사다 겜치고는 전투씬 자체가 굉장히 적습니다. 다른 겜들은 전투가 너무 많아서 하다보면 지치는 느낌도 있지만 파라로스의 스토리 진행은 대부분 전투 없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마저 별 재미없는 노우 이야기에 5할 이상 할당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초반보스격으로 나온 3뱀은 별 일 없이 퇴장하고 노우 이야기로 넘어가면 자코들이나 패고 있고... 라스트보스전은 이게 쌈박질인지 소개팅인지 칼 하나 박고 밀당만 해버리니 전투적 재미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몇 없는 전투씬 중에서는 나하트-라일-아스트 3파전이 가장 즐거웠습니다. 소돔침공을 시작하면서 쥬다스가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노우가 라일한테 박살난 후 쥬다스가 노우를 비꼬면서 등판. 그리고 이어지는 라일(나하트)vs쥬다스, 그리고 아스트의 참전까지
파라로스에서 분위기가 가장 달아올랐던 파트. 아스트가 성대연기랑 캐릭터가 구려서 분위기를 좀 죽이는 주범이긴 했지만요. 그런데 주인공
보이스가 없기 때문에 쥬다스 혼자 신이 난 느낌도 있어서 신장판에서 주인공 보이스를 추가했으면 했습니다.
3. 더블주인공과 히로인 문제
카카카에서 복수주인공을 시도한 적이 있는 마사다지만 그래도 그쪽은 하바키가 메인주인공이고 나머진 동료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파라로스는 더블주인공 형태가 명확한 게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더블주인공이 파라로스의 약점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노우 이야기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로인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하며, 그 히로인이 죽자 복수에 미쳐간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히로인을 위해 일어선다. 이런 전개가 싫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무래도 마사다하고 궁합이 안좋은 타입의 주인공이에요. 이 시기의 마사다의 텍스트가 정제되지 않은 구석도 많아서 보다보면 쓸데없이 중2한 텍스트와 지리멸렬한 똥폼이 조화가 안됩니다. 두명의 주인공을 작중에서 한번 크게 부딪혀보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구성도 세련미가 부족했죠. 그렇다고 둘의 싸움이 재밌었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메인주인공 라일. 강하고 폼나고 쿨한 남자지만 속은 상냥한 면이 있는 주인공. 정형화 된 주인공타입 중 하나입니다. 디에스의 렌보다는 낫긴 하지만 확실히 말해서 이쪽도 재미있는 주인공은 아닙니다. 나하트라는 괴물을 속에서 키우면서 정체성을 고뇌하는 주인공 속성 역시 그렇게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라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Liar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좀 더 질척하고 균열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기대 해봤지만 의외로 별 이야기도 없었고. 결국 마사다의 치명적 약점으로 꼽히는 주인공 캐릭성의 옅음은 데뷔작부터 이랬다는 겁니다. 이카베이의 주인공인 빌헬름은 애당초 적캐릭터이므로 몇년 후에 발전했다고 할 수도 없겠죠. 물론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는 의미에서 라일이 뛰어난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럭저럭 멋나고 시원한 타입이긴 합니다. 쇠사슬+데스사이즈(이 톱같은 무기를 뭐라고 부르는지 기억 안남ㅋㅋ) 무기 조합도 흔히 보는 주인공 무기가 아니라서 신선했고.
그리고 주인공(라일)+히로인(리루) 조합이 마사다 겜 중에선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바보히로인을 무시하고 패고 욕하는 주인공 조합은 원래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만 노우와 더블히로인(여동생+아스트) 조합은 미묘했습니다. 주인공으로서 노우의 캐릭터가 애매한 탓도 크지만 히로인도 구리니까요. 여동생은 처음에 웬 모브캐릭터인 줄 알았고 캐릭터도 재밌는 구석이 없습니다. 애당초 제가 여동생 포지션을 싫어하고. 아스트 또한 성우연기가 매우 하수이며 노우와 뜬금없이 접점이 생기는 탓에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이 시절의 마사다는 캐릭터 관계 설정에서 세련미가 떨어집니다.
4. 어색한 성우
성대에 대해서도 집고 넘어가자면 역시나 아스트 연기가 불만이었습니다. 중요한 장면들에서 악을 지르며 감정을 토로하는 연기가 국어책읽기 수준입니다. 마사다겜 하면 성우들의 신들린 연기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성우들과 마사다 캐릭터들의 시너지 효과 폭발은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아스트는 대체 어쩌다 이꼴이 된건지...
게다가 라스트보스 사타나일의 연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사다하면 또 실질적 주인공인 라스보스가 떠오르는데, 과학자랍시고 말 한마디한마디가 평탄한 텐션의 캐릭터가 사타나일이긴 하지만 최소한 뜨겁게 일그러진 연기 몇번은 보여줬으면 했습니다. 아스트는 그냥 성우의 연기력이 부족했다면 사타나일은 캐릭터 문제가 컸다고 봅니다. 결국 여기서도 르네상스 연기(쥬다스)가 최고였어요.
5. 부족한 캐릭성
디에스의 메르크리우스가 마리를 신좌에 올려놓기 위한 극을 짰다고 하면 사타나일은 본인이 직접 신좌에 오르기 위한 극을 짰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보면 사타나일이 꽤나 능동적으로 진두지휘하고 스케일 큰 라스트배틀을 보여줄 거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점이 또 문제입니다. 본인의 전투장면은 거의 없다 해도 될 정도로 거의 설명충 입장에 있는 캐릭터. 라스트보스이자 진주인공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마사다의 보스캐릭터인 주제에 확 튀는 구석이 없단 말이죠.
그 외에도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던 3뱀(흑형은 폼 잡게 해주더니 전투씬마저 스킵당함ㅋㅋ)이나 왜 등판했는지 모를 시그마같은 단발성 캐릭터들이 눈에 띄지 못했습니다. 마사다의 캐릭터들은 엔딩 날때까지 어떻게든 작품에 관여함이 특징인데도 파라로스는 주역급 몇명 외에는 그렇지 못했죠. 히로인 역할을 주려고 한 노력은 보이지만 역시 성대연기가 거슬렸던 아스트만 봐도 확 끌리는 캐릭터가 별로 없었습니다. 베르제바브가 그래도 노우 등을 갈굴 때 꽤 즐거운 캐릭터이긴 했습니다만 그 보라머리 여편네 상태의 비주얼이 영 안어울려서...
결국 파라로스는 쥬다스라고 생각합니다. 시로는 그렇다치고 나라카+르네상스(성우) 캐릭터 중에서 스쿠나와 더불어 이 쥬다스가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총을 이용한 전투묘사가 시로나 스쿠나보다 디테일 한 것도 특징. 다양한 어조와 텐션의 레스트 인 피스나 상대를 비꼬는 말투하며 나라카의 분신으로서 운명과 쥬다스 본인의 의지가 모순되는 상황에 대한 자조 섞인 장면들이 파라로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물론 마사다가 나라카 설정을 이때 이미 생각해 놨을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6. 명확한 주제의식
쥬다스가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의지에 기반하는 존재증명이 파라로스의 주제입니다. 파라로스가 마사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점을 고르라면 바로 주제의식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사타나일이 부하들에게 정말 요구했던 인간 자신의 의지, 그리고 스스로 생각했던 쥬다스와 리리스, 결국 아스트에게 부족했던 이 적극적 자유가 사타나일이 신좌에 오르기 위한 핵심이었음을 볼 때 파라로스는 결국 끝까지 하나의 주제로 이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 전개 덕분에 중2배틀력이 약해지긴 했습니다.
그리고 엔딩 장면들(에필로그)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사실 에필로그 이야기 자체는 마사다의 전형적인 환생 장면들지만 엔딩곡을 흘려주면서 여운에 잠기는 감성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거든요. 엔딩곡 자체도 마사다 겜 중에선 가장 좋은 편이고.
7. 적은 BGM 수와 동인 수준의 작화
브금 수가 부족해서 같은 브금이 계속 쓰인다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카카가 브금이 많지 않았음에도 항상 다양한 브금으로 신바람 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걸 보면 역시 파라로스는 브금력도 부족했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배틀용 BGM 지분이 낮은 원인이 컸습니다. 그래도 요나오는 요나오라서 곡 몇개는 꽤 훌륭합니다. 마음에 든 브금을 뽑아보면 Apocalypse, Fallen Angel, God Save The Zoar(ED곡) 3개.
사실 제일 문제는 그림... G유우스케가 아닌 미네오카의 그림은 정말 동인레벨입니다. 사타나일이 막 쩔게 잘생겼다고 묘사되는데 그냥 뭔가 보고 있으면 엄청 어색하게 생김ㅋㅋㅋㅋㅋㅋ 일반CG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사다겜의 전형적인 연출 중 하나인 라스트배틀 돌입 장면 연출에서도 막 사타나일+쥬다스+아스트가 한 컷에 나오는 장면이 어색하기 그지없어요ㅋㅋㅋㅋㅋ 대사도 별 거 없었고. 그나마 라일+나하트가 잘 그린 편.
8. 아쉬운 평가
뭐 여튼 혹평이 많은 신좌만상 시리즈 1편 감상이었습니다. 플레이하고 한참 나중에 쓴거라서 기억이 애매해서 쓰기가 꽤 어려웠네요. 솔직히 말하면 이 겜을 다른 마사다 작품보다 먼저 접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평가가 훨씬 올라갔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사다겜인 걸 의식하고 해버리니 다른 겜과 달리 데뷔 시절의 부족함이 확 느껴지니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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