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조종당하지 않는 숙적의 자아를
겐노스케는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다.
그 여름 날에 만난 이후
겐노스케가 세이겐을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있었을까.
너무나 눈부셨다.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에
벨 수 밖에 없었다.
세이겐과 만났던 누구든
그 빛에 마음을 빼앗겨
그러한 선망이 악의가 되어
미검사의 두 눈을 도려낸 게 아닐까
<스루가성 어전시합>을 각색한 만화. 원작하고 제법 차이가 있는 걸로 압니다. 여튼 꽤 재밌었습니다.
두 남자의 질긴 악연이 교차하며 극한으로 치닫는 전개는 언제나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만화의 두 주인공 겐노스케와 세이겐의 대립구도가 바로 이러한 플롯이었고 두 남자가 서로를 의식하며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알면서도 알지 못할 부의 감정을 부딪히면서도 마지막엔 상대를 이해하고 최후의 승부를 펼치는 장면은 15권 내내 이어진 두 남자의 이야기의 결착에 어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말이죠.
우직하고 말이 없는 그야말로 사무라이의 표본같은 겐노스케와, 아름다운 외모와 언동으로 타인을 현혹하던 야심 넘치는 세이겐의 성향은 딱 이러한 구도에 어울리는 캐릭터였습니다. 특히 세이겐은 자신의 출신을 속이기 위해 부모를 죽일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찬 남자로 보였지만, 사실 그 근본은 높은 지위의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싶었던 모순을 스스로도 눈치 못 챈 장면이 좋았죠. 게다가 중간에 한번 참회하고 동료들과 함께 나아갈 것을 결심하지만 겐노스케의 아무 생각 없는 한마디가 다시 한번 그를 돌려놓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 직전에 겐노스케 역시 밑바닥 출신이었다는 걸 깨닫는 등 꼬이고 꼬인 그들의 즐거운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작품이 대개 그렇듯 겐노스케의 매력이 세이겐에 비해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직한 호랑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별로지만 세이겐 이야기가 또 훨씬 재밌으니까요. 그래도 겐노스케도 그렇게 웬수였던 세이겐의 자아를 긍지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중간중간 에피소드에서 의미를 잡지 못하고 넘어가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마지막에 겐노스케가 세이겐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던 점도 굉장했죠.
그리고 이 만화의 주제 중 하나였던 과거 일본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런 두 남자의 극한의 대립으로 표현된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1권 시작부터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새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성립되는 것이다'로 의미를 주며 시작한 시구루이는, 자랑스러운 숙적으로 여겼던 세이겐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사무라이' 겐노스케가 구토를 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에의 자결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완성됩니다. 봉건사회의 마조히스트였던 겐노스케와 그런 사회를 속으론 부정하고 싶었던 세이겐의 이야기가 시구루이라는 만화입니다. 그리고 미에라는 히로인이 그런 대립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죠. 특히 스승의 말에 복종하던 겐노스케와 달리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준(세이겐의 목적이야 어찌됐든) 세이겐에게 홀리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무명역류나 코간류의 검법들 다 묘하게 재밌었습니다. 막 보고 있으면 따라해보고 싶음. 사실 시구루이의 배틀씬은 그렇게 역동적이지는 않죠. 한컷한컷 떼어놓으면서 컷 하나에 의미를 담아내는 스타일. 이런 연출 등은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재밌던 전투는 코간 복수전.
다만 상상의 장면을 너무 남발해서 흐름이 끊기거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다소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음... 꼬츄들 몸뚱아리 구경하는 건 좋아하지만 시구루이는 유두를 너무 리얼하게 그려놔서 많이 부담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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